[산티아고일기]-표지/머리말
지금부터 3년 4개월 前, 나는 배낭을 메고 40일간의 순례길을 나섰다. 프랑스 남단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고, 스페인 북부지역을 횡단해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걸었다. 모두 800 km를 걸었는데 영성을 얻고자, 번제(燔祭)를 드리고자, 그리고 원망을 버리고자 나선 길이었다.그 길에서 감성과 이성에 앞서 영성이 있음을 깨달았고, 이 나라 민주화세력의 역사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음을 느꼈으며, 18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시고 남은 원망을 다 태워버릴 수 있었음을 큰 다행으로 생각한다. 많은 사람에게 은혜의 길, 치유의 길, 기적의 길이었던 이 길은 나를 영성의 길, 번제의 길, 비움의 길로 안아주었다.
산티아고 길은 자기를 찾는 길이었다. 산티아고 길을 걷던 4일째, 나는 문득 새소리를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피레네 산맥을 넘던 첫 날부터 시원한 풍광, 선선한 바람, 따스한 햇살로 어우러진 그 아름다운 길에 매료되어 감탄했던 터였다. 이미 벌써부터 새들은 지저귀고 있었을것이다. 뒤늦게 귓가에 들려오는 새 소리, 그것은 비로소 내가 내 자신과 만나기 시작하는 신호였다. 오랜 시간 도시생활로, 운동권으로,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를 은폐시키면서 동시에 남에게 나를 알리는 데만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나를 잊고 살아왔다는생각을 했다.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원래의 나를 만나볼 수 있었다.
처음 며칠 간 나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저 걸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참 평화로웠다. 그 다음 며칠은 길과 하나 되어 걸었다. 길은 친구였고 위로였다. 길에게 나를 맡길 수 있었다. 그 다음 며칠은 내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길은 애인을 만나는 것처럼 감미로웠다. 행복했다. 울고 있는 나를 만났고 무엇엔가 짓눌려 있던 나도 만났다. 그 다음 며칠은 다시 마음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마치 어머니처럼 나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다시 잘 살아보라고. 마지막 며칠은 휴식을 취했다. 어느새 그 휴식조차 낯선 사람이 되었다. 피니스테라에서, 나중에그라나다에서 취했던 그 며칠의 휴식이 26일간 걸었던 수많은 시간 보다 더 지루하게 여겨졌다. 그래서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다시 설레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수 없이 감탄했다. 그 감탄의 연속에서 그동안느끼지 못했던 일들을 찾고 발견하면서 나는 내가 그동안 잊어버렸던또 잃어버렸던 많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은 길 자체의 추억못지않게 잊어버렸거나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회상이 참 많았다. 수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또 정리해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많은 기도를 했고 명상도 했다. 성당에 앉아서만 드린 기도는 아니었다. 걷는것도 기도가 되는 줄도 알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대략 135만 보쯤을 걷고 왔다. 그 기도의 힘이었을까? 고백도 많았고 참회도 많았다.눈물로 용서를 구하고 몇 번은 눈물로 기도했다. 그렇게 내게 산티아고가는 길은 하나님과 나만 아는 기도의 길이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 800 km 그 2천리 길을 걸으면서 나는 참 많이 울었다. 부르고스(Burgos)에서는 평생토록 변함없이 인생길을 함께 갈것 같은 친구와 헤어지며 가슴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엘 간소(El Ganso)에서는 새벽길에 부슬비를 맞으며‘ 그날이 오면’을부르다가 펑펑 쏟아지는 빗속에 숨어 꺼이꺼이 소리 지르며 눈물을 토했었다. 파티마성당에서 지는 해를 등지고 성모 마리아의 현신장소에앉아‘ 하나님, 대한민국의 운동권을 뜨겁게 사랑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정말 내 가슴에 짓눌려 있던 그 억울함, 분함 모든 것들을 폭발시켜 내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그래, 나는 운동권이다, 이렇게 세상에 말하면서. 순간 기적처럼 나는 운동권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 관련된 책을 몇 권 읽었었다. 짧은 기간 문화적 동질감이라도 갖고 가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책이 문화나 문명과곁들여진 여행기이거나, 안내서이거나, 에세이였다. 그러나 나의 이 책은 여행가이드북으로도 부족하고 유럽의 문화나 문명을 이해할 만한교양을 곁들인 안내서는 더더욱 아니다.나는 나의 상상력과 삶을 정리하고 간간이 한국사회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정리하곤 했다. 그래서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은 내 생각의 수많은편린들이 뒤섞인 짬뽕과 같은 미셀러니(경수필, miscellany)라고 할수 있다. 이것이 내게는 산티아고의 추억이라 해도 좋겠다. 그렇다고 해C a m i n o d e S a n t i a g o20 | 머리말도 독자들은 왜 이 길이 순례자의 길이며 영성의 길이고 또 치유의 길이며 기적의 길인지 언뜻언뜻 스쳐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부분은 일기원문을 가급적 살려 싣고 한 부분은 내가 생각하고 느낀 상상력을 중심으로 엮었다. 정종곤이 도와주었다. 가보지도 않은 길을 나 보다 더자세하게 자료들을 들여다보면서 마무리를 도와주었다. 공부도 많이했단다. 참 고맙다.
이제 산티아고 길은 마음의 길로 남아있다. 그 길을 경험한 후 나는길고 짧은 새 길을 나설 때 마다 늘 설렌다. 길이 주는 힘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길이라도 다 좋아 한다. 지금 내가 다시 걷고자하는길은 꼭 마음의 길도 아니다. 더더욱 도시의 콘크리트길이나 농촌의흙길도 아니다. 정치적으로 진보의 길이지만 그저 사람의 길이라고 남기고 싶다. 그 끝 어디쯤 복지국가와 통일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나는살아서 평화를 거쳐 반드시 통일을 볼 것이다. 산티아고 길을 걸은 이후 웬만한 길은 겁이 나지 않았는데 다시 두근거린다. 진보라는 말 앞에 처음 운동할 때의 기쁨으로 다시 서는 기분이다.